-진영 개인전 서문에 부쳐-
이진명,미술비평 • 철학박사
깊고 조밀한 숲의 마술적 시각 언어가 펼쳐진다.숲은 기억의 형태로 자란다.과거의 감정, 유년의 장면,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무의식적으로 스치며,사라진 시간은 그 안 에서 형형색색의 잎맥으로 퍼진다.진영의 회화는 그 숲의 심층에 은밀히 숨겨진 하나의 정 원으로 우리를 이끈다.그러나 그 정원은 순수한 유토피아가 아니다.그것은 무의식의 안쪽 에 놓인 복합적 감정의 땅,자본과 정보와 욕망과 슬픈 좌절의 언어로 뒤덮인 기억의 토양이 며,그 위에서 잃어버렸던 씨앗이 불온하면서도 화평한 기운을 머금고 올라오는 꿈같은 정원 이다.
그곳에는 앵무새 가면을 쓴 인간들이 있다.모두가 닮은 얼굴을 하고,모두가 유사한 동작을 반복하며,어떤 이는 자전거 타고,어떤 이는 연 날리고,어떤 이는 풍선 불며 논다(소요한다).하지만 그 놀이에는 기쁨이 없다.표정도 없다.언어도 사라졌다.그들은 유년의 몸을 하고 있으나,삶을 상상하지 않는다.투쟁에 지쳤을까?아니면 삶을 소요(逍遙)로 치부하는 것일까?알 수 없다.그들의 몸짓은 자율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갇힌 서사에 움직이는 것만 같다.작가 진영은 이들을 통해 말한다-오늘날의 인간은 너무 많이 보고,너무 많이 따라 하고,너무 쉅게 웃는다.진정한 감정의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이 회화의 숲은 바로 무의식 의 정원이다.
지나간 유년의 이미지,반복되는 집단적 몸짓,꿈처럼 겹친 다리와 연못,기이한 구조물 속에 서 작가는 마치 분석심리학자(정신분석학자)인 듯,현대인의 내면 깊숙한 상흔과 욕망을 풀 어놓는다.그 시선에는 호오(好惡)• 선악(善惡)• 적서(嫡庶)• 귀천(貴賤)• 존비(尊卑)• 장단(長短)• 고하(高下)등 가치 판단을 유보한다.수직의 위계에서 벗어난 수평적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그 수평적 자유는 횡적으로 이동하며 거듭해서 의심을 낳기에 평화롭다기보다 불온한 자유이다.정원은 기억을 품지만,기억은 늘 타인의 목소리를 따라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그럼에도 그 숲 어딘가에는 아직 기억의 씨앗이 남아 있다.진실했던 하나의 감정,사랑해서 두근거렸던 누군가가 아련한 눈빛으로 건냈던 손길을 받았던 인생 최초의 순간,그리고 처음 풍선을 띄웠던 그 순간,그러한 파편적 감정의 씨앗이 남아 있다.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 것을 다시 찾게 한다.작가의 그림은 질문이 되고,우리는 그 안을 걷게 된다.그 걸음은 『장 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처럼 선선하며,조조(曹操,155-220)의 아들 조비(曹丕, 187-226)가 거행했다는 전설의 유연(游宴),남피지유(南皮之游)처럼 웅혼하다.그래서 보는 우리는 또다시 묻게 된다. "나는 왜 이 장면을 알고 있는가?내가 언젠가 이 정원에 있었던가?"
진영 작가의 작품은 단지 귀엽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그것은 철학적 시각으로 구축된 비판 적 동화이며,반복의 시스템에 길들여진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 되묻는 무의식의 풍경화이기 때문이다.즉,우리 모두의 내면에 떨어진 그 작은 씨앗으로 인하여 작가의 정원은 간단(間斷)없이 자라기 때문이다.
진영 작가의 정원은 겉보기에는 유희적이고 온화해 보이지만,집단적 익명성,동일한 동작의 반복,비현실적이고 닫힌 세계를 통해,현대인이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불안,공허,소외,정 체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이는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1450-1516) 가 중세 말 혼란 속에서 인간의 타락과 구원 문제를 상징의 언어로 정리했던 방식과 본질적 으로 닮았다.보쉬의 트립티크(triptych)<쾌락의 동산>에서 중간 패널에 등장하는 쾌락에 빠진 인간 군상은 진영 작가의 그림 속에서 놀이하는 앵무새 인간들과 매우 유사한 정서를 갖기 때문이다.보쉬의 회화에서 온갖 쾌락을 누리는 당사자들(죄인들)은 곧 지옥의 심판을 받을 예정이라면,진영 작가의 당사자들은 공통으로 표정이 없고,자율성이 없으며,반복적 동 작 속에 자신을 소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의 회화로 해석할 수 있다.진정으로 보쉬는 괴물과 인간의 혼종(混種)으로 인간의 욕망을 드러냈고,진영은 귀여운 앵무새 가면으로 오늘날 인간을 표상한다.
때마침 필자가 경모하는 6세기 양나라 소명태자(昭明太子)소통(蕭統,501-531)은 「앵무부 (鷃鵡賦)」라는 시(부)를 쓴 적이 있다.소통은 불후의 명저 『문선(文選)』의 편찬자이자 동아시 아 문학의 토대를 세웠던 위대한 인물이다.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승려였던 광택사 법운(法雲)스님이 18 세였던 소통에게 불경 강론을 요청할 정도로 문사철(文史哲)의 귀재였다.소통 의 「앵무부」는 다음과 같다.
말할 줄 아는 기이한 새 한 마리,언제나 때를 알아 소리를 내고,때로는 몸이 푸르고 비췻빛 이 반짝이며,혹은 흰 몸이 눈처럼 빛나기도 한다.부리는 앞으로 갈고리처럼 휘었고,걷는 모 습은 단정하며,날개를 높이 치켜들어 춤추듯 가볍게 난다.발은 붉은 단사(丹砂)같고 세 갈 래로 벌어지며,눈은 황금 같고 쌍둥이처럼 둥글다.${ }^{1)}$
이 시의 매 구절은 단순한 외양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앵무새라는 존재자를 통해,인간이 갈 망하는 인간의 본질,가령 언어성,조형성과 질서에의 갈망,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영원한 좌절을 은유하고 있는 매우 고도의 수사이다.예를 들면 이렇다.소통의 「앵무부」에 등장하는 앵무새는 언어의 소유자이다.그 언어는 말하는 기이한 새로서의 특별한 능력이다.이에 반해 진영 작가의 앵무새 인간은 반복하고 모방하는 존재이며,말 없는 놀이를 영위하는 이 시대의 인간을 표상한다.소통의 앵무새는 빛나는 색채를 드날리며 정제된 비율을 자랑한다.진영 작 가의 앵무새 인간은 유사한 형상에 갇히며 집단적 동일성에 귀속한다.집단무의식,집단의 광 기에 가까운 욕망과 트라우마를 구유(具有)한다.소통의 앵무새는 단정한 걸음과 우아한 날갯 짓을 자랑한다.군자(君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진영 작가의 앵무새 인간은 일상적 움직임을 반복한다.(자전거,연날리기 등).사회적 시스템에 길들여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앵무새는 진귀함,제국적 질서 속의 상징이다.반면에 진영 작가의 앵무새 인간은 후기 자본주의적 인간 으로 진정성의 위기를 겪는 우리를 가리킨다.소통은 수사적 찬미와 이상적 형상의 추구를 통 해 인간을 긍정하고자 한다.진영 작가는 앵무새 인간을 통해서 사회와 세계를 향해 시적 비 판을 가한다.감미롭지만 갇힌 공간으로서 정원,유희와 놀이를 추구하지만 불확실한 인간 존 재가 그것이다.이렇게 보면,진영의 앵무새 인간은 소통이 묘사한 앵무새의'거울상',즉'반 상(反像)',혹은 카운터파트(counterpart)처럼 보인다.소통은 앵무새를 통해 질서•언어•미 의 전형(典型)을 그렸다면,진영 작가는 같은 앵무새 형상을 통해 모방-침묵-불안의 글로벌 현실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그래서 진영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구체적으 로 무엇일까?천 가지 만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그러나 나는 또다시 소명태자에게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소명태자 소통은 13 세 때「대언시(大言詩)」와「세언시(細言詩)를 지었다. 그 내용은 장자(莊子)적이며,웅혼하면서도 섬세하다.앞의 시는 마크로(macro)의 세계이며, 뒤의 시은 마이크로(micro)의 세계이다.진영 작가의 세계가 이 둘을 모두 품는 이치와 같다.
거대한 곤(鯤,전설의 물고기)을 보고도 바큇자국 물구덩이 피라미처럼 본다.저 푸른 바다[滄海]를 보고도(한숨에 마실 수 있는)한 잔의 술처럼 가벼이 여긴다.하늘과 땅을 지나며 조심 스럽게 몸을 숙이다 이내 우주를 뛰어넘어 저 창공을 날아오른다.${ }^{2)}$
허공의 먼지에 기대어 누우며,하루살이 날개에 매달려 날아다닌다.지척의 가까운 거리에 이 르는 데 세 개의 가을이 지나가며,가는 터럭을 지나는 데 아홉 해가 흐른다.3)
이 두 구절은 소통의 철학적 상상력과 장자적 사유가 잘 혼합되어,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목표를 지향해 준다.이 시들은 명백히 『장자』「소요유」의 대소비유(大小比喩)를 빌리면서도, 그 안에 문인으로서 자기 인식,존재론적 상대성,그리고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시적으로 정제 해 낸다.(「대언시」를 통해)첫째,아무리 위대한 거대 환상이라 할지라도 일상의 관점을 소중 히 여겨 작게 볼 수 있어야 한다.둘째,거대한 바다조차도 한 모금의 물처럼 상대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셋째,어차피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 안에서 불안정하게 태어났다.넷째,그 러나 그 작고 위태로운 존재도 한순간에는 전체 우주를 넘나드는 초월적 비상을 이룰 수 있 다.사랑 • 믿음 • 우애 • 효제를 통해서이다.(「소언시」를 통해)다섯째,우리가 발 딛는 존재의 터전은 실체가 없는 허공일 수 있다.여섯째,우리는 미세한,유한한 것에 몸을 맡기는 존재에 불과하다.일곱째,그럼에도 우리는 짧은 시간,가까운 거리조차 지극히 긴 여정으로 변환할 수 있는 존재이다.여덟째,(궁극적으로)우리는 내가 속한 미세한 세계를 상상으로 거대화, 상대화해 낼 수 있으며,감각의 역전을 통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회복할 수)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말하지만,진영 작가의 한 폭의 그림이 우리를'어딘가 먼 곳'으로 이끈다.그것은 실제 공간이 아니며,기억 속 풍경도 아니다.진영의 회화가 열어젖히는 세계 는 현실과 무의식,놀이와 불안,유년과 탈진(脫盡)한 오늘이 겹치는 정원이다.작가는 이 정 원의 문턱에'앵무새의 얼굴을 쓴 인간들'을 배치한다.그들은 말이 없고,표정이 없으며,반 복된 몸짓 속에 머무른다.바로 우리다.우리는 자칫하면 미약한 인식의 감옥에 갇힐 수도 있 다.그러나 또 한 편,감각의 역전을 통해 무한한 자유를 얻기도 한다.
2끝으로, 진영 작가의 회화 작품에 내재하는 의미는 벨기에 현대 화가 마이클 보르만스 (Michaë Borremans, 1963-)의 회화 작품과 유사하다. 보르만스의 인물들은 대개 무표정하 거나 익명적이며, 행위의 맥락이 결여한 상태로 나타난다. 이는 현대인의 고립감, 주체의 해 체, 감정의 억압 등을 시사한다. 작품 속 장면들은 특정 시대나 공간에 뿌리내리지 않는다. 연극적 세트처럼 인위적이며, 중단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이클 보르만스 의 작품은 중성화되어 있다. 진영 작가의 작품 또한 중성화되어 있다. 그 인물들의 지향성 은 애매모호하다. 즉, 이 두 작가의 인물군은 모두 페르소나(가면)로 기능하고 만다. 인간 주체는 더 이상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라, 기표의 껍데기처럼 조형된 이미지 일 뿐이다. 그래서 더 동시대적이며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림이 우리의 지극한 현실에 물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이며 치밀하고 정치(精緻)한 진영 작가의 회화 작품 속에서 우 리는 시각적으로 즐거우면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