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신여주 (미술비평)
진영(Jin Young, 1982~ )은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채우고 쌓아 나간 깊이 있는 화면에 ‘앵무새(parrot) 머리를 한 사람들’을 그린 회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그는 2010년부터 한지에 안료, 아크릴 혹은 혼합된 재료를 사용하여 캐리커처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 무렵의 작업은 주로 앵무새의 머리만을 부각시켜 보여주는 형태였다. 이후 그는 이 앵무새 모티브를 발전시켜 앵무새의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겹겹이 중첩된 덩어리를 이룬 채로 외발자전거나 사다리 위에 올라가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펼치고 있거나(〈play the parrot〉,2011), 파도나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풍경을 보여주는 회화 작업을 선보였다(〈swept away〉,2012). 여기에서 바다의 물결이라든지, 이후 〈sweet pumpkin〉(2014~2016) 연작에서 두둥실 나타나 화면을 가득 채운 호박과 주위를 맴도는 구름을 표현하는 데에는 민화의 전통적인 방식을 접목하기도 했다. 그의 작업에서 다양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앵무새 사람들’은 물질을 상징하는 형상인 ‘도넛’과 함께 움직이며 일제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뭉치거나 흩어지고, 매스게임을 하듯이 서로를 모방하여 같은 동작을 수행하는 장면은 마치 대량으로 복제된 공산품을 보는 것과 같은 시니컬한 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서로 의존하여 기대어 사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후 작가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일상이 변화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집 근처의 공원에 종종 들러 산책을 하며 여가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happy island〉(2020) 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평소의 관심과 함께 이러한 자전적인 경험을 담아낸 회화 연작이다. 캔버스에 아크릴과 겔 미디엄을 사용하여 표현한 〈happy island〉 의 울창한 숲이 우거진 화면 속 조그마한 앵무새 사람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들은 공원에서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고, 킥보드를 타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각자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실제로 공원에서 아이와 함께 하곤 하던 행동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또한 누구나의 평범한 일상이기도 하다. 그림에 나타난 앵무새 사람들의 모습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이 도심 속에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인 공원이 처음 생겨난 것은 고대 문명(文明)이 탄생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권력자들은 자신의 성, 혹은 궁궐 안에 인위적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조경을 하거나, 혹은 사냥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Park’라는 말은 고대 프랑스어로부터 유래된 단어로서, 본래 사냥감 보호구역을 뜻했다. 귀족들은 오락으로서의 사냥을 즐기기 위해 울타리를 쳐서 그 안에 동물을 키우고,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와 사냥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사냥감이 울타리 밖으로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공원은 본래 울타리로 구분된 인위적인 자연 공간이자 오락의 장소로부터 비롯되었다. 다시 진영의 〈happy island〉 의 화면으로 돌아와서, 그가 보여주는 공원은 마치 도심 속에 하나의 섬과 같이 분리되어 지배자 혹은 전지적 관찰자가 내려다보는 눈 앞에 펼쳐진 가상의 연극 무대와도 같이 드러나 있다. 앵무새 사람들의 행위는 어떤 목적성을 지니기보다는 일종의 유희처럼 전개된다. 즉 떼를 지어 다니며 분주하게 촉각을 세우지만 커피를 마시고, 산책하고, 도넛을 좇아가고, 또 다시 커피를 마시고, 산책하고, 도넛을 좇는 행위를 반복하며 허무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쳇바퀴와 같은 과정인 것이다. 마치 기계인형과도 같이 남들이 하는 일상 행위를 단순히 반복하고 모방하며, 구태여 공원의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인간의 몸을 하고 있어 태생적으로 날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혹여 자신이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듯 하다. 그렇기에 하나하나 섬세한 작업으로 묘사되어 있는 앵무새 사람들의 행동은 보는 이에게 사랑스러움과 웃음을 유발하지만, 어딘가 '웃프다'. 그들은 각자 삶이라는 연극 무대 위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속한 문명화된 사회 구조에 스스로 함몰되고 안주하여 살아가는 모순된 존재로서의 우리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의 행동을 모방하고 또 반복하는 앵무새 사람들의 행동에는 예외가 있다. 가령 2020년에 밤을 배경으로 그린 연작 〈treasure hunters〉(2020) 에서, 랜턴을 들고 무언가를 찾아 다니는 무리 중 한 마리는 화면의 ‘외부’, 즉 반대편 언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 순간 가상의 무대 위에 펼쳐진 연극을 들여다보는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캔버스, 그러니까 사각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프레임일 뿐이며, 지금, 여기 서 있는 장소는 바로 화면 속 앵무새 사람이 응시하는 ‘외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에서 연극 무대와 같은 가상의 공간이 지닌 일관성은 깨어지고, 모호해진다. 이처럼 진영은 앵무새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불현듯 관람자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지 못하도록 저해함으로써 자체의 의미를 완결 짓지 않는다. 이는 화면 속에 작게 그려진 앵무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근작에서 공원을 배경으로 앵무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온 진영은 이번에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수련이 있는 연못(The Water-Lily Pond)〉(1917~1920) 연작을 오마주한 신작인 〈finding utopia〉(2023) 를 새롭게 선보인다. 〈finding utopia〉 에서 앵무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원은 이전과 같이 고립된 섬과 같은 장소가 아니라, 연못을 사이에 두고 아치형의 다리를 통해 이어진 공간으로 드러나 있다. 이제 앵무새 사람들은 다리와 길을 매개로 하여 이편 저편을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이다. 〈finding utopia〉 의 화면에 나타나는 이러한 공간상의 변화는 앵무새 사람들의 일상 역시 고착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길’과 ‘다리’와 같은 연결의 도구는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화면 속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 너머에 존재할 캔버스의 표면 어딘가의 ‘외부’, 즉 현실 세계로 앵무새 사람들이 머무는 가상의 공간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finding utopia〉 는 그의 작업과 그 곳을 노니는 앵무새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우리들과 세상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며, 이는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진영의 〈finding utopia〉 의 모티브가 된 〈수련이 있는 연못〉 은 말년의 모네가 파리 근교 지베르니(Giverny)에 정착하여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풍경을 정원과 연못을 조성하여 인공적으로 구현한 뒤 이를 다시 캔버스 위에 옮겨낸 작업이다. 모네는 동일한 풍경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자신의 눈에 비친 풍경을 다채롭게 담아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성서에 등장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관행을 과감하게 거부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네의 삶의 태도와 같이 앵무새 사람들이 공원 안에서 안주하기를 멈추고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면, 비로소 그들을 둘러싼 울타리를 벗어나 유토피아(utopia)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